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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접속일 : 26-01-19 가입일 : 22-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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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성리학의 거두로 불리는 남명 조식(1501~1572),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평생을 벼슬길에 오르지 않음으로써 진정한 기개 펼친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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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무/ 소설가, 2007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소설집 '마우스브리더' '푸른 눈썹' 동화집 '두꺼비 대작전' '일어선 용 날아오르다' '연지사종의 맥놀이' 등을 펴냄. 경남작가상, 경남민족 예술인상, 남명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경남소설가협회 회장, 박경리문학관 사무국장으로 있다.

조선 성리학의 거두로 불리는 남명 조식(1501~1572)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평생을 벼슬길에 오르지 않음으로써 진정한 기개를 펼친 인물이다. 또한 말년에는 지리산 자락에 산천재(山天齋)라는 학당을 짓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다.

장면 1 : 마음에 맺힌 응어리를 내뱉고 싶었으나...

“얼굴을 드시오.” 젊은 임금의 눈과 남명의 눈이 마주쳤다. 명종 임금의 용안은 밝지 못하였다. 아니 어둡다는 편이 더 맞는 표현이었다. 평소 연약한 체질인데다 조금만 일기가 고르지 못하면 감기와 함께 자주 흉격증을 느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과 여러 외척들 사이에서 마음고생이 얼마나 격심했는지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지난해 친정(親政)을 시작한 후로 이것저것 손수 결정하고 고심하느라 심신의 피로가 누적되었음이 한눈에 보였다. 그만큼 눈빛이 흐렸고 몸피와 달리 수척한 모습이었다.

“가히 듣던바 그대로구려.” 임금은 훤칠한 키에 얼굴이 깨끗해 무엇이든 들여다보면 비칠 것 같은 남명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눈이 맑고 단정한 몸가짐을 보이면서도 굳은 의지와 위엄을 갖춘 것이 드러났다. 지금껏 궁궐에 무수히 드나든 벼슬아치 중에 저렇듯 높은 풍모를 가진 이는 아직 보지 못하였다.

“태산처럼 우뚝한 시풍에 눈꽃 같은 눈썹이, 마치 운무를 보듯 장엄하구려.”

“황송하옵니다, 전하.”

“그래, 내 그대를 보니 신선을 만난 듯 겸허해지는구려.”

“당치도 않으신 말씀이옵니다. 전하.”

“헌데….” 임금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어찌하여 관포를 입지 않고 포의(布衣)를 입고 왔는가?”

“신이 불민하여 그동안 전하께옵서 여러 차례 불러주시었으나 나오지 못하였사옵니다. 하온데 황송하옵게도 전하께옵서 손수 약을 보내게 하여 그동안의 불충을 깊이 속죄하기 위하여 이렇듯 상경한 것이옵니다.”

“아니, 그럼 이번에도 벼슬을 받지 아니 하겠다?”

남명은 잠시 숨을 골랐다. 이미 한양에 당도하면서부터 몸에 느껴졌던 기류, 소문으로만 들어온 남명을 보겠다고 모여든 수많은 선비와 벼슬아치들을 통해 전해지던 가벼움, 또 임금을 배알 하면서 보았던 그림자 등을 떠올리면서 다시 한번 굳게 마음을 다잡았다. 상소를 하던 것과는 달리 직접 나라와 백성의 상황을 전해 실질적인 대책을 세우는 것이 무엇보다 급했다.

“저는 먼 시골에 엎드려 있어서 지금 세상일을 잘 모르옵니다. 허나 수십 년 이래로 백성들의 마음은 조정을 떠나있고 군사들은 지휘를 따르지 않아 마치 물이 제 갈 길로 가버리는 것 같사옵니다. 전하께옵서는 늘 백성을 생각하고 계시지만 폐단은 여전하옵니다.”

“여전하다?”

“예, 그러하옵니다. 백성들은 곤궁하고 찌들어 살길을 찾아 가족마저 서로 뿔뿔이 흩어지고 있사옵니다. 마치 둑 터진 물처럼 민심이 흩어져 달아나고 있으니 마땅히 이들을 구제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할 것입니다.”

“실상이 그리 처참한가?”

“처참을 넘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옵니다.”

“허면, 과인이 어찌하여야 한단 말인가?”

남명은 다시 숨을 돌렸다가 말을 이었다.

“중국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 때에는 임금과 신하 사이에 격의가 없고 매사 진지하게 의논하였으므로 세상이 태평하였사옵니다. 그러나 후대에 와서 임금이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어 신하가 아첨하기를 좋아했으므로 세상이 어지러웠사옵니다. 임금이 현명하면 신하가 정직하고 임금이 어리석으면 신하가 아첨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이옵니다.”

순간, 임금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지금 이 나라가 매우 어지러운 까닭도 자신이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임금이기 때문이라는 뜻이 되지 않는가. 남명도 임금의 용안이 급작스럽게 흐려지는 것을 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겉으로 백성을 위하고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 같지만, 천하의 아첨꾼을 일일이 들어가며 내칠 것을 말하고 싶었다.

(소설집 <하지만 우리는 살아남았다> 중 단편 ‘남명매 심은 뜻은’ / 하아무 / 모악 / p109~111)

장면 2 : 급한 일을 구제해야 한다

남명은 제자들 양성에 더욱 힘을 쏟았다. 그중에서 병법에 더욱 시간을 많이 할애해 전략적인 면에서나 실제 전투에서 활용할 수 있는 수련을 하도록 했다. 특히 왜구의 침입에 대비한 여러 가지 책제(策題)를 통해 제자들을 시험하고 준비하게 했다.

“외교적인 노력으로 왜구를 미리 막아내거나 꺾을 계책은 없겠는가?”

“멋대로 재난을 일으키고 거짓으로 친교를 내세우며 제포(薺浦, 창원시 웅천)를 돌려 달라거나 재물을 요구하는데 퇴치 방법으로 무엇이 있는가?”

“왜적들이 우리를 업신여기고 대규모 도발을 해올 경우, 병사와 무기는 어떻게 운용하는 것이 좋은가?” 실제 일이 벌어진 것도 아니고 왜구가 침입해 온다고 하더라도 소소한 경우가 많아, 제자들 중에는 “노망나신 게 아닌가?” 하고 떠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지금 당장이라도 왜구를 섬멸하러 짓쳐 들어갈 듯한 남명의 기세를 믿고 따랐다. 명종의 뒤를 이어 임금에 즉위한 배다른 동생의 아들 선조(宣祖)도 계속 남명을 불렀다.

“큰 내를 건너려면 반드시 배와 노가 있어야 하고 큰 집을 지으려면 반드시 기둥과 대들보감이 있어야 하오, ……내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어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으니 도와주시오.”

“과인이 어진 이를 만나보고 싶은 마음 날로 간절해지오. 그대는 나이 많은 노인이니 이런 추위에 길을 나서기는 어려울 터, 날씨가 따뜻해지기를 기다려 언제든 천천히 올라오도록 하시오.” 하지만 한번 굳힌 남명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선조가 내린 교서에 남명은 매번 사양의 뜻과 함께, 하고 싶은 말을 강하고 날카롭게 전하였다.

“구급(救急)!” 남명이 선조에게 바친 한 마디였다. 수천, 수만 마디 말보다 더 정확한 말이었고 이보다 더 절실한 말이 없었다. 이 한마디 말을 하기 위해 낮은 말단의 벼슬아치부터 정승에 이르는 높은 관료까지, 심지어 임금의 실정과 폐단을 지적해야만 하였으니 다시 한번 죽음을 무릅써야만 했다. 그러나 미리 예상했던 대로 정치개혁은 없었다. (소설집 <하지만 우리는 살아남았다> 중 단편 ‘남명매 심은 뜻은’ / 하아무 / 모악 / p12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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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 '하지만 우리는 살아남았다' 표지


장면 3 : 어지러운 세상 속 매화는 피어나고

사면초가에 들어앉아 사방으로부터 불쑥불쑥 날아드는 칼과 창을 정수리와 등판, 옆구리로 받아내는 사이에 부인 남평 조씨가 세상을 떠났다. 56년 동안 부부로 살아가면서 안락한 생활보다는 고통과 인고의 나날이었으니, 소리 없는 눈물만 흘렀다. 남명이야 스스로 선택한 삶이라 하지만, 말없이 남명 이상으로 모든 고통과 근심을 짊어졌어야 했던 생이었다. 남명이 가난한 살림 가운데서도 그나마 학문과 제자를 가르치는데 전념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부인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네가 가서 상주 노릇을 하여야겠구나.”

남명은 큰아들 차석을 김해로 보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퇴계 이황의 부고를 들었다. 도산은 덕산과 5백여 리 떨어져 있으니 두 달 가까이 지나서야 당도한 부고였다.

“아, 나도… 이 세상에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남명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또 절망하였다. 같은 해에 태어나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안 의식하면서 혹은, 의식하지 않는 동안에도 서로 의지가 되어온 사람이 아니었던가. 한 번도 만나보지는 못하였지만, 그 어떤 친구보다 깊은 정을 나누었고 서로의 세계를 이해하고 격려하였다. 반면 잘못된 판단과 언행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해 느슨해지지 않도록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런 이황이 저세상으로 가버렸다는 것은 남명에게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었다.

“이제 누가 나를 살펴 일깨워준단 말인가?”

<민암부> 이후에도 두어 차례 더 상소를 올렸지만, 그야말로 소귀에 경 읽기였다. 선조 임금이 다시 불렀을 때 1,600자에 달하는 긴 상소를 올려 서리(胥吏)들의 폐단을 지적하고 나라 상황이 갈수록 더 급박해지고 있다고 지적하여도 소용없었다. 심지어 “임금 바로 아래 도적이 가득 차 있고 나라는 텅텅 빈 껍데기만 끌어안고 있는 꼴이옵니다.”라고 까지 했지만 선조의 반응은 태평이었다.

이황이 죽은 해 큰 흉년이 들어 그렇지 않아도 고단한 백성의 삶은 고통, 그 자체였다. 남명은 다시 임금의 실정을 통렬히 비판하였다. “전하의 나랏일은 이미 결딴났는데도 여러 신하와 벼슬아치들은 서서 구경만 하고 손을 쓰지 못합니다. ……군의(君義, 임금이 옳아야 한다)라는 두 글자를 새로 바치오니 전하께서 먼저 몸을 닦고 나라를 바로 잡으소서.” 남명이 목숨을 걸고 올린 상소도 임금이 현실정치에 반영하지 않으니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남명은 출입이 부자연스러워지면서 산천재에 앉아 천왕봉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횟수가 크게 늘었다. 눈이 침침해지는 듯 서책을 보는 시간도 줄었고, 깊은 생각에 빠진 듯 혹은 시름에 겨운 듯 표정이 어두웠다. 간간이 오는 친구나 제자들의 편지를 기다렸다가 반갑게 맞았고 받은 즉시 답장을 보내었다. 마치 끊어지고 막힌 길을 이을 수 있는 곳이 밖으로 나 있다는 듯 자꾸만 바깥으로 눈길을 주었다.

“스승님, 근심이 있으신지요?”

어느 날 제자들이 모여 남명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내게 근심이 없던 적 있었던가? 근심은 이미 나의 오랜 동무가 되어 있지 않은가.”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사온 지…….”

남명은 근래 보기 드물게 온화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특별한 이유?”

“예, 몸이 편치 않으시면 의원을 불러올까 하고…….”

“그럴 필요 없네. 허허, 오늘 자네들이 이렇게 모였으니 차 한잔 하면서 얘기나 해보세.”

갑자기 산천재에 활기가 돌았다. 한편으로 차를 달이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삶은 감자와 옥수수 등 참을 내왔다.

맑은 녹차 한 잔을 들어 천천히 음미하고 난 후 남명은 입을 열었다.

“나는 오랫동안 경(敬)과 의(義)를 바탕으로 몸과 마음을 닦아왔네. 제법 내 세계를 이루었다는 생각으로 가르치기를 시작하였고, 은일(隱逸)로서 외람스럽게도 사림의 종장(宗匠)이라는 말도 들어 왔네.”

언제나 눈을 뜨면 그곳에 천왕봉이 있었다. 그것은 축복이었고 경외였으며, 그대로 가르침이었다. 그 가르침을 받들어 남명은 세상을 보았고 자신을 보았던 것이었다.

“허나 생각해보면 내 공부는 항상 미진하였네, 다른 이들의 비난과 비판에 흔들렸고, 풍설과 세태에 귀를 내맡겼으며, 권세가의 협박에 몸을 떨었고, 질병과 가난에 한숨을 내쉬었는가 하면, 나라의 서글픈 현실에 눈물도 흘렸고, 다른 이들과 친구들의 몰이해에 가슴을 치기도 하였다네. 그때마다 나는 길을 잃었고 절벽 위에서 혹은 꽉 막힌 막다른 길에서 최후를 맞는 심정으로 무심한 하늘만 원망스레 쳐다보았었네.”

남명은 지니고 있는 경의검과 성성자를 꺼내놓았다.

“평생 나를 일깨워 학문과 실천을 독려해온 물건이네. 죽기 전에 경의검과 성성자를 그대들에게 줄 터이니, 부디 내 길이 그대들에게 이어져 있음을 잊지 않기를 바랄 뿐이네. 눈에 보이는 길은 끊어질 수 있을지언정, 마음과 마음으로 이어진 길은 어떤 박해로도 결코 끊을 수 없을 터이니.”

맑고 가볍게 돌돌거리던 물소리가 고즈넉이 잦아들고 있었다.

“생강과 약재로 쓰는 계수나무 껍질은 오래 묵을수록 맛이 더욱 매워진다네. 나 역시 늘그막에 이르러 오히려 매워지고 있어. 이제 밖에서 들려오는 비난은 매양 차가운 웃음으로 흘려버리게 되었지. 목을 잘리게 되더라도 전혀 애석할 것이 없다네. 설령 자객이 나를 겨눠 시위를 메우고 있다손 내가 하지 못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남명은 마당에 탐스럽게 피고 있는 매화나무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환갑에 직접 심은 나무였다. 모진 추위 속에서도 봄기운을 알아차리고 꽃봉오리를 밀어 올리듯 스스로의 나아감도 그와 같이하리라 다짐했던 그때 생각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만족스럽다고 할 순 없지만 후회 없는 삶이었다.

소설집 <하지만 우리는 살아남았다> 중 단편 ‘남명매 심은 뜻은’ / 하아무 / 모악 / p127~131)

ㅡ 출처 : 문학인신문(http://www.munhakin.kr)

ㅡ 기사 원문 보기 : http://www.munhakin.kr/news/articleView.html?idxno=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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