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소개]
2024년 필리핀 NSSU 전시회에서 시 부문 최우수상을 받았으며, 2024년 박경리문학관 주최 평사리 문예창작교실 다카시 백일장에서 장려상을 받았다. 현재 시학과시 작가회, 선과예술, 시와숲, 경남시조, 한국문인협회 하동지부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시인의 말 · 5
1부
함구 · 13
소금쟁이 · 14
계단 한 개 · 15
젓가락 한 짝 · 16
가장 아플 때는 가장 덤덤하게 · 17
벽 · 18
하늘 청문회 · 19
대세론 · 20
뒷면 · 21
다녀오라는 말 · 22
고집불통 · 23
길 · 24
예순 즈음에 · 25
눈앞의 오지 · 26
2부
금의 힘 · 29
박카스 · 30
꽃무릇 · 31
색즉시공 · 32
본촌띠기 박순임 · 33
하늘 문자 · 34
인력사무소 · 35
마지막 뻥을 치고 있다 · 36
단축번호 1번 · 37
목장갑 · 38
어떤 설법 · 39
꽃팬티 · 40
목련 · 41
칡 · 42
복숭아꽃 · 44
3부
모성 · 47
동백은 지고 · 48
엄마라는 간짓대 · 49
인연줄 · 50
여름밤 · 51
손끝 · 52
퉁치다 · 53
엄마의 밥 · 54
일몰 · 55
둥근 피붙이들 · 56
수직의 그리움 · 57
먼나무 · 58
콩나물 · 59
능소화 · 60
4부
세일즈맨 · 63
절이다 · 64
꽃핀 · 65
혼자 사는 여자 · 66
젊은 날의 빗금 · 67
마흔 · 68
행운은 가끔 · 69
솔솔솔 · 70
홑 · 71
시소 · 72
채석강 · 74
프로가 되는 길 · 75
승진의 비결 · 76
어항 · 77
개불알꽃 · 78
해설 ‘덤덤함’으로 빚어낸 진정성의 힘/ 김남호 · 79
[책속으로]
[표제시]
가장 아플 때는 가장 덤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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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라는 말은 가장 아프다는 말이다
괜찮아라는 말은 가장 그립다는 말이다
괜찮아라는 말은 가장 힘들다는 말이다
-
그 말은 돌아서서 하는 말이다
그 말은 검은 마스카라가 번져도 명쾌하게 하는 말이다
그 말은 돌아선 어깨가 각이 잡힐 때 하는 말이다
-
떠난 뒤 그가 얼마나 허물어질지 알기에
가장 덤덤하게
가장 짧게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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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시]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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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눈물을 숨기는 곳
둥근 포옹을 거부하는 곳
힘든 하루를 기대는 곳
-
딸아이 미완성 그림이 붙어 있는 곳
내 독백이 먼지처럼 쌓이는 곳
내 뒷걸음을 말없이 받아주는 곳
-
밀착해본다 납작한 포옹이다
차가운 벽에 가슴을 대면
벽의 가슴에서 내 심장이 뛴다
--
엄마의 밥
--
당신의 가마솥 밥에는
물의 높이를 가늠하는
손금 자와 눈금 자가 있었지
-
손가락 마디의 작은 눈금 자도 있었지
매일 하는 밥에도
계절마다 변하는 에누리가 있었지
햅쌀에는 물의 양을 자작하게 했고
묵은쌀에는 넉넉히 손등을 넘기는 짐작이 있었지
-
어림이 정확한 잘된 밥을 식구들 밥그릇에
나누어 담을 때도 누구 하나 서운할까봐
당신의 마음은 삼베오리처럼 섬세했지
-
그때 먹은 게 밥이 아니었음을
당신의 가슴이고 심장이었음을
오늘 혼자 식은밥 먹으면서 깨닫네
[출판사 서평]
유귀자의 시는 짧고 예리해서 비수를 연상시킨다. 상대적으로 긴 시편들도 의미의 장악력과 응집력 때문에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일상의 풍경 속에서 시적 대상을 골라 낚아채는 감각이 탁월하고, 그것을 자기 세계로 끌어당겨 자신만의 언어로 형상화하는 능력이 돋보인다. 은유를 구사하는데도 은유처럼 느껴지지 않고 자연스럽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능란하다는 뜻이고 오랜 시간 자신의 감각과 언어를 탁마한 덕분이다.
유귀자 시의 힘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은유’라는 비유의 방식에서 나온다. 비유는 단순히 표현의 수단이 아니다. 그 비유를 통해서 시인은 자신의 사유와 철학을 드러낸다. 다른 하나는 ‘진정성’이다. 그의 시를 읽다보면 시인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도 끝까지 들어주고 이해해줄 것 같은 느낌이 들거나, 시인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 편이 돼줄 것 같은 신뢰가 느껴진다. 이런 공감과 신뢰를 만드는 게 바로 ‘진정성’이다. 이것이 어떤 꾸밈도 계산도 없는 ‘순수한 진심’이다.
‘진심’만큼 상대를 굴복시키는 강력한 무기가 없고, ‘공감’만큼 상대를 응원하는 강력한 위로가 없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유귀자 시인은 ‘진심’과 ‘공감’을 버무려서 ‘덤덤함’이라는 필살기를 사용한다. 표제시 「가장 아플 때는 가장 덤덤하게」는 “괜찮아”라는 말의 모범적 용례이다. 이 시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괜찮아”라는 말이 가장 힘이 있을 때는 반어적으로 쓰일 때다. 전혀 괜찮지 않을 때 가장 유효하다는 뜻이다. 그냥 아픈 게 아니라 ‘가장’ 아플 때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아플 때는 가장 덤덤하게”라는 이 경구(警句)는 오랜 삶의 경륜에서 얻어낸 뜸 든 지혜이다. 이때의 ‘덤덤함’은 무덤덤함을 가장한 ‘세심한 배려’이자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 아니겠는가.
유귀자 시의 매력을 위의 두 힘으로는 온전히 설명할 수가 없다. 그의 시는 은유와 진정성을 동원하여 닿고자 하는 지점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바로 ‘따뜻함’이다. 그냥 따뜻함이 아니라 속 깊은 배려에서 오는 따뜻함이다. 이때의 ‘배려’는 ‘마음 써서 보살피고 도와주는’ 좁은 의미의 배려를 말하는 게 아니다. 시인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의 질감이고, 세계를 온몸으로 껴안으려는 태도와 자세이다.
시인의 치열함을 얘기할 때 두 부류로 나눈다. 하나는 ‘시를 쓰기 위해 사는 사람’, 다른 하나는 ‘살기 위해 시를 쓰는 사람’. 오로지 시를 쓰기 위해 이번 생을 바치는 시인은 존경받아 마땅하겠지만 시라도 쓰지 않으면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은 시인을 더 아껴줘야 한다. 유귀자 시인은 후자에 가깝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