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대 말부터 70년대에는 '토지' '김약국의 딸들' '시장과 전장' '파시' 등 장편소설 연달아 발표
소설가 박경리 선생이 별세한 지 15년이 흘렀다. 지난 4월 끝자락에 강원도 원주시 단구동 1620-5번지에 자리한 박경리 문학관을 찾았다. 선생의 옛집 나무 대문을 들어서자 진홍빛 철쭉이 싱그러웠다. 어제 내린 비를 아직 물고 있는 뜨락은 떠난 주인을 닮은 듯 온화한 기운이 가득했다. 철쭉 사이사이 표지판에 담긴 싯구들도 꽃으로 피어 있었다.

젊은 시절의 박경리 선생
마당에 들어서자 이제 한창 피기 시작한 꽃들과 연둣빛 새순이 펼치는 4월의 아름다운 향연을 지그시 바라보고 계신 선생의 부조물이 반겼다. 소매 걷은 헐렁한 셔츠를 입은 채 곁에는 호미 한 자루와 장갑을 벗어놓고 큰 바위에 걸터앉은 선생의 곁을 훈훈한 봄바람이 부채질 하고 있었다. 선생이 생전 너무나 아꼈다는 집은 주인이 떠난 지 15년이 지났지만 그대로 청청했다. 이층으로 된 콘크리트 집 창문을 통해 들여다본 방안에는 앉은뱅이 책상에 퇴색된 원고지와 펜이 그대로 얹혀 떠난 주인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박경리 선생은 1926년 10월 28일 경상남도 통영군 통영면 대화정에서 출생하였으며 1945년 진주공립고등여학교와 1950년 서울가정보육사범학교 가정과(현 세종대학교)를 졸업했다. 본명은 ‘박금이’이며 박경리라는 필명은 김동리 선생이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단란했던 박경리 가족사진 (뒷줄 왼쪽부터 박경리, 남편 김행도, 앞줄 친정어머니 아들 딸)
단란했던 박경리 가족사진 (뒷줄 왼쪽부터 박경리, 남편 김행도, 앞줄 친정어머니 아들 딸)
통영 출신인 선생이 원주와 인연을 맺은 것은 순전히 ‘어미’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원래 딸과 아들 남매를 두었던 선생은 8살 된 아들을 잃은 참척의 아픔을 겪었다. 무남독녀가 된 딸 영주씨가 저항시인으로 이름 높은 김지하의 아내인 것은 다 아는 일. 김지하 시인은 원래 전남 목포 출신이었으나 15살 때 부모가 원주로 이주했다. 딸 부부는 시댁이 있던 원주에 둥지를 틀었지만, 사위인 김 시인이 민청사건으로 투옥되고 말았다. 가장을 감옥에 두고 산송장이 된 딸과 손자 원보를 돌보기 위해 선생은 원주에 터를 잡았다.
선생은 이곳에서 <토지> 4, 5부를 집필하고 탈고했다. 당시 살던 원구동 집이 택지 개발지에 들어가게 되자 1998년 흥업면 매지리의 회촌마을로 이사하였고 그때 받은 보상금과 토지공사의 기부금을 합쳐 토지문화관을 세웠다. 그때 선생이 살던 단구동 집은 지금 박경리문학공원이 되었다.
원주 외에도 경남 하동군과 고향인 통영시도 박경리기념관을 만들어 선생을 기리고 있다. 문학관 두 곳은 작품 <토지>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하동에 있는 문학관은 소설의 배경이 된 평사리에서 파생됐고 원주에 있는 문학관은 자식으로부터 파생된 곳으로 구분할 수 있겠다.
원주에 있는 문학관에는 소설 <토지>의 역사도 잘 정리돼 있지만 인간 박금이에 대한 기록이 더 눈길을 끌고 애정이 간다. 정원을 한 바퀴 도는 동안 ‘평사리 마당’과 ‘홍이동산’, ‘용두레벌’을 다시 만나 더욱 감회가 새로웠다.
박경리 선생이 본격적으로 문학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당시 문단의 중견 작가였던 김동리와의 우연한 만남에서 시작됐다. 당시 선생은 소설보다는 시를 주로 쓰고 있었는데, 박경리의 시를 처음 본 김동리는 시도 좋지만 소설을 써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러던 중 습작 <불안지대>가 <계산>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어 《현대문학》에 추천되었다. 1년 후인 1956년 단편 <흑흑백백>이 재추천 되면서 정식 등단했다. 등단 직후에는 단편 소설을 많이 썼으며, 50년대 말부터 70년대에는 <토지> <김약국의 딸들> <시장과 전장> <파시> 등 장편소설을 연달아 발표하며 호평을 받았다. 특히 <김약국의 딸들>은 2년 동안 무려 42쇄를 찍은 인기 작품이었다.
소설 <토지>는 1969년 1994년까지 무려 25년 동안 집필했다. 집필하는 동안 세상일과 단절한 채 몰두했으며, 1부를 쓰던 중 암 선고를 받고 수술까지 하는 등 소설도 선생의 인생 역사도 최극점의 상황이었다.
<토지>는 동학농민혁명에서 광복까지의 파란 많던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작품으로 한민족의 방대한 역사 기록이며 한국문학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는다. 2003년 <토지>에 이어 해방 이후를 배경으로 한 소설 <나비야 청산(靑山)가자>를 연재하기 시작했으나 폐암 발병과 뇌졸중으로 2008년 5월 5일 별세했다.
선생은 작가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명성을 얻고 대한민국 문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지만, 인간으로서는 누구보다 굴곡진 삶의 주인공이었다. 6.25때 행방불명된 남편과는 겨우 4년의 시간을 보냈고 8살짜리 아들도 잃었다. 선생이 겪은 이런 엄청난 슬픔이 글을 쓰기 시작한 동기가 됐을까.

원주시 단구동 박경리 옛집
원주시 단구동 박경리 옛집
단구동 옛집 건너편에 있는 문학관에는 선생의 가장 행복한 시절을 상징하는 사진 한 장이 걸렸는데 친정어머니와 남편, 그리고 두 아이와 찍은 사진이다. 인생의 ‘화양연화’를 만끽하는 표정이 보여 가슴 뭉클하다. 이런 지난한 삶을 겪는 동안 “부지런하고 우직한 남자 만나 깊은 산속에서 밭매고 채소 키우며 살고 싶다”는 소망을 지녔던 여자 박금이. 그래서 그렇게 늙음을 예찬했으려나.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휭덩그레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꾹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 (중략)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홀가분하다> 중에서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홀가분하다'는 그 역설이 굴곡의 삶에 대한 회한인 것만 같은 것은 나만의 오독일까.
누구나 인생을 돌아보면 만족보다는 후회와 낙망이 점철된다. 선생 또한 그 아픔을 문학화하면서 수없이 울고 수없이 다시 태어났으리라. 단구동 푸른 마당에 선생을 홀로 두고 돌아왔지만, 선생을 다시 불러 볼 수 있는 5월이어서 기껍게 행복하다. (이주옥 기자)
ㅡ 출처 : 문학인신문(http://www.munhakin.kr)
ㅡ 기사 원문 보기 : http://www.munhakin.kr/news/articleView.html?idxno=10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