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모든 것이 변합니다.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변합니다. 너무 빨리 변하다 보니 따르기조차 버겁습니다. 이런 변화의 회오리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찾기란 힘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변하지 않는 고갱이가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갖습니다. 그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변해야 한다는 강박과 변하고 싶지 않다는 안간힘 사이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거나 발명하게 합니다.
스마트소설도 그런 강박과 안간힘의 소산일 것입니다. 전통적인 소설들이 독자들을 잃어가고 문학의 위기가 심심찮게 운위되는 시대에 작가들은 독자들과의 소통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 고민의 형식적 특징은 '단소경박(短小輕薄)'이라는 현대인의 기호를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시도 '디카시'라는 새로운 형식을 찾기에 이르렀고, 소설도 '스마트소설'이라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에 이른 것입니다. 새로운 형식이 새로운 감동으로 이어지고, 새로운 감동이 새로운 독자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에 이병주문학관에서는 이런 흐름을 제대로 짚어보고 스마트소설이 장르소설로서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토론의 장을 마련하고 스마트소설집을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의 기획과 진행에는 경남소설가협회의 도움이 컸습니다. 감사드립니다.
2022년 11월
이병주문학관장 김남호
[책소개]
소설가 17인이 구축하는 짧고 강렬한 삶의 단면들. 짧은 소설집 『마네킹이 필요하다고요?』는 일상의 단면을 잘라내 삶의 내부를 전시하고 관찰하는 소설부터 묵직하고 강력한 한 방을 날리는 소설까지 다양한 소설이 포진되어 있다. 콩트, 엽편소설, 스마트소설, 짧은 소설 등 사용되는 명칭은 제각각이지만 간결하고 후루룩 읽을 수 있어 독자들이 쉽게 손을 뻗을 수 있는 짧은 소설이 주목을 받고 있다. 『마네킹이 필요하다고요?』는 단편과 장편에 비해 비교적 생소한 형식인 짧은 소설의 특징을 살려 새로운 서사를 시도한다.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페이지터너로 기능하는 소설을 출간하여 독자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가고자 하는 것이다. 짧다고 해서 그 깊이가 옅은 것은 아니다. 표제작인 「마네킹이 필요하다고요?」는 수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관계를 이어나가지만 자기 내부의 진정한 고민과 속내는 마네킹에게 털어놓을 수밖에 없는 인물들을 보여주며, 인간 근원의 상실감과 고독을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소설집에 수록된 짧은 소설들은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여주며, 때로는 강렬한 반전을 남기며 돌아서고 때로는 여운을 흩뿌리며 우리를 돌아보게 만든다.
▶ 전체를 아우르는 일상의 한 순간
아이들이 올 시간이 되어 급한 걸음으로 돌아와 이층계단을 중간쯤 오르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뒤돌아서 계단을 내려가 장독대에 앉아 김치를 버무리고 있는 아줌마 앞으로 다가섰다. 검은 봉지에서 탐스러운 사과 세 개를 꺼냈다.
“사과가 먹음직스럽고 때깔도 좋지요?”
-「사과하기 좋은 날」 중에서
지난하게 흘러가는 하루. 매일 똑같은 하루 속에서 사소하지만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사건들. 소설 속 인물들은 사건으로 인한 뭉근한 상처를 품속에 안고 감내하며 살아가거나(「장독」), 기회를 엿보며 기다리기도 하고(「소심한 복수」), 어렵게 건넨 사과 한 알로 날려 보내기도 한다(「사과하기 좋은 날」). 또한, 강력한 한방으로 삶의 방향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순간들을 포착하기도 한다(「황소바람이 분다」, 「벽련항 횟집」). 인물이 지닌 삶의 태도를 보여주는 소설들은 그들의 현재를 붙잡고 과거와 미래까지 끈질기게 달라붙는다. 이렇듯 각 소설은 일상 속 한 순간을 포착하여 집중시키지만, 그 속에 삶의 얼개를 함축적으로 심어놓아 전체 삶을 포괄한다.
▶ 도전의 장벽을 낮추는 과감한 시도
이번 소설집에서는 새로운 서사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소설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동·식물 등 인간이 아닌 생물의 시점에서 인간주의적인 시선을 전복하기도 하고(「짖어야 개지」, 「지구촌」),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흐리고 대본의 형식을 취하며 서사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작업을 시도하기도 한다(「흑형이 무대를 떠나며」). 또한 전래동화의 한 장면을 현대식으로 해석하고 재구성하여, 옛이야기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제공하기도 한다(「날개옷」). 이러한 시도가 가능한 것은 짧은 소설이 그 길이의 간결함에 기대어, 도전이라는 장벽을 낮추게 만들고 과감하게 뛰어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짧은 소설은 이제 더 이상 낯선 양식의 소설이 아니다. 우리가 쉽고 즐겁게 향유할 수 있는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새로운 시도를 거듭하며 함축적으로 서사를 포괄하는 짧은 소설이 그 간결한 분량 이상의 감동으로 독자를 찾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