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주는 살아 있었다. 하동의 지존으로 현현하여 이명산 자락인 그의 집에 왕림했다. 지난 3월 29, 이병주문학관(관장 이종수)에서 <봄날의 문학 콘서트>가 열렸다. 전시된 작품 속 한시 서예를 보고 조광수 교수의 특강을 들었다. 80여 명의 인파가 몰려들어 의자가 부족할 정도였다. 기쁘고 고무적인 일이었다.
나림 이병주 선생은 그동안 소외되어 있었다. 초중고 어느 교과서에도 나림의 작품을 본 적이 없다. 출생지 하동이나 청소년기를 보낸 진주에서도 김동리나 박경리보다 값을 못 받았다. 그러나 “한국에서 가장 위대한 소설가”라는 말 말고는 나림에게 붙일 수식어가 없다.
한 작가의 탄생에는 필연적 계기가 있다. 국제신문사에서 주필 및 편집국장을 하던 그가 소설가로 우뚝 서게 된 동기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그것은 박정희의 혁명을 비판한 필화사건으로 인한 수감 생활이다. 지식인이 교도소에서 할 일이란 뭐가 있겠는가. 나림은 엄청난 양의 책을 읽었다. 문학은 고통받는 실패자의 기록이라 했던가. 1년 7개월의 감옥에서 구상한 『소설 알렉산드리아』로 화려하게 등단한다. 당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그 이후 나림은 늘 쓰기에 바쁜 주문형 소설가로 탄생한다. 그리하여 소설 88권과 수필 40권이라는 전무한 기록을 남겼다.
나림이 이렇게 폭발적인 작품을 쓴 동기는 어디에 있을까? 나림은 “한이 많아 글을 쓴다.”라고 했다. 그 한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많은 지식인이 일제 치하에서, 한국전쟁에서, 사상적 대립 속에서 그들이 가진 재능을 피어보지도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나림은 숱한 별처럼 명멸해 간 지인들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했던 건 아닐까. 『지리산』의 박태영, 『관부연락선』의 유태림을 생각하면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소설을 썼을 것이다. 그것이 살아남은 자의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면서.
나림 소설의 무대는 전 세계이지만 또한 짙은 향토색으로 우리를 유인한다. 북천 앞 개천, 진주의 하숙방, 지리산의 험준한 산맥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홍용화는 “과연 이 놀라운 작가적 열정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나는 그 중요한 연원으로 하동에 내려올 때면 산과 강과 들판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하동의 생명력과 어떤 연관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라고 했다. 『지리산』에는 모든 지명이 실명으로 나와 우리를 놀라게 한다. 국제무대를 휘젓고 다녔지만, 애틋한 향토성도 지닌 작가라는 반증이다.
나림은 한국 최대의 다작가이다. 짧은 시간에 폭발적인 작품을 썼지만, 그 수준은 높았다. 독후감인 『허망과 진실』을 보니 루쉰, 도스토예프스키, 사마천을 본받았다. 특히 필명을 이사마라고 짓고 사마천처럼 준엄하게 기록하려고 하였기에 태작이 거의 없었다.
나림은 대자유인이었고 이데올로기 대립을 경계했다. 그는 “사랑이 없는 사상은 각박하고, 사상이 없는 사랑은 천박하다”라고 하였다. 오늘날 첨예하게 대립된 한국 정치를 보고 어떤 충고를 할까? “죽은 사람도 살리는 게 사상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사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일갈할 것 같다. 나림의 고향이 하동이라는 사실은 분명 우리에게 축복받은 일이다. 하지만 이런 최고의 작가가 제대로 대접받지 않고 있다면 향토에 사는 우리의 책임도 크다. 나림이 먼저 간 지인들에게 빚을 지고 소설을 썼다면 우리도 나림에 대한 부채가 있다. 그것은 나림이 남긴 문학적 향기를 많은 사람들이 향유하도록 널리 알리는 일이다. 그 바탕에 이병주 문학관이 있다.
글: 진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 곽재용
ㅡ 출처 : 하동신문 https://www.hadongsinmoon.com/news/articleView.html?idxno=7114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