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주 타계 30주기…새로 읽는 나림 명작] <13> ‘빈영출’과 ‘박사상회’
저잣거리 흥망성쇠 이야기…그 맛깔난 풍자·해학이 삶에 던진 질문
- 김종회 문학평론가
- | 입력 : 2022-12-11 19:42:55
- | 본지 16면
- 1982·83년 ‘현대문학’에 발표
- 세상살이 요령·수단으로 일관
- 몰락의 길 걷는 주인공 내세워
- 재미와 시대 비판 함께 담아내
- 서슬퍼런 군사정권 시절 작품
- 풍자·해학 한층 더 빛나는 대목
- 우리 문학사 속 괄목할 성과작
- 장편으로 확대 안돼 큰 아쉬움
1992년 타계한 작가 이병주는, 당대의 한국문학에 보기 드문 면모를 남긴 인물이다. 그는 1921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일본 메이지대학 문예과에서 수학했으며, 진주농과대학과 해인대학 교수를 역임했고 부산 ‘국제신보’(국제신문의 전신) 주필 겸 편집국장을 지냈다. 이상에서 거론한 이력이 그가 40대에 작가로 입문하기까지 겉으로 드러난 주요한 삶의 행적인 셈인데, 그 내면적인 인생유전의 실상에서는 결코 한두 마디 언사로 가볍게 정의할 수 없는 엄청난 근대사의 파고(波高)를 밟아왔다. 그러한 체험은 한 작가를 통하여 역사가 문학을 추동(推動)한 하나의 범례로 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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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 서상균 기자 seoseo@kookje.co.kr |
■ 빈영출-빛나는 해학과 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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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흥부와 놀부, 백설공주와 계모 왕비를 새롭게 가치 규정하는 탈근대적 세태의 면모가 결부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모든 곡절 가운데서도 인간에 대한 존중, 인간의 위신에 대한 믿음은 예나 이제나 촌보의 변동도 없다. 그러한 까닭으로 ‘빈영출’에서는 실제적 해설자인 성유정의 감회에 깊이를 더한다. ‘박사상회’에서는 조진개의 몰락과 천금순의 명물(名物)화를 병치하고, 역사에서 세속으로 시간·공간적 이동을 감행했으되 오래 묵은 그 근본을 그대로 안고 왔다. 소설 배경으로 지리산을 매설하는 것도 매한가지이다. ‘빈영출’의 이야기 무대는 바로 그 지리산 자락이고 ‘박사상회’의 천금순은 지리산 출신이다.
‘빈영출’은 1982년, ‘박사상회’는 1983년 모두 ‘현대문학’에 발표됐다. 신군부 군사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때다. 그러기에 이 작품들 속 풍자와 해학은 한층 빛나는 대목이 된다. 일종의 우화이되 우화만으로 그치지 않게 하는, 우리 삶의 존재 방식에 대한 예리한 질문이 소설 행간에 숨어 있다. 소설을 쓰기 시작한 지 20년 가까운 세월에 원숙한 작가의 기량과 유장·유려한 문장이 넘치는 모양은, 마치 황순원이 그 단편 창작 역량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소나기’나 ‘학’과 같은 명 단편을 썼던 것을 유추하게 한다. 김유정의 해학적 인물 묘사, 채만식의 역설적 의미 생성에 비추어서도 문학사적 친족관계를 발견할 수 있다.
‘빈영출’의 소설적 이야기는 설화에서 소설까지의 서사 장르 변화를 함께 담은 듯하며, 천일야화(千一夜話)를 닮은 몇 개 기발한 삽화가 잠복해 있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이병주 소설의 여러 절목을 두루 펼쳐놓는다. 지리산이 남쪽으로 뻗은 자리의 고향, 독립운동가였던 숙부, 학도병 출신 관찰자 등이 그러하고 ‘조금 색다른’ 방식이긴 하나 친일문제를 천착하는 것도 그러하다. 이 소설은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일관하면서 작가 다른 여러 소설에서 이미 우리에게 낯익은 성유정이란 인물을 등장시킨다. 성유정의 성정(性情)도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려 깊고 사색적이며 주변 신뢰를 한 몸에 걷어 들인 그대로다.
■ 박사상회-어둡고 쾌활하고 아픈
‘박사상회’ 중심인물 조진개를 묘사하는 대목이 김유정의 ‘봄봄’이나 ‘동백꽃’ 인물 묘사와 방불하다는 사실은, 당초 이 부문 전문성으로 출발하지 않은 작가의 시각이 한결 폭넓고 부드럽게 세상사의 풍광에까지 미쳤다는 반증이다. ‘불로동’이 소설 무대이며, 이곳은 15년 전 서울시에 편입된 변두리 빈민가다. 여기에 어느 가을 석양을 등지고 조진개라는 자가 나타난다. 이 사내를 통해 현실에서 도무지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가 천연덕스럽게 펼쳐지고,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그것이 자연스럽게 납득 되도록 하는 힘이 이 작품 가운데 있다.
시종일관 이 문제적 사내를 관찰하는 ‘나’는 사건에 개입하지 않고 방관하는 화자이지만, 관찰자를 내세우는 작가의 이야기 구성 관행을 닮았을 뿐 그 역할은 별반 강세가 없다. 이처럼 무색무취한 해설자를 굳이 내세울 필요가 없어 보이는 채로, 그는 결말에 이르기까지 주어진 소임을 다하기 위해 애쓴다. 그 결말은 사뭇 교훈적이며 여전히 부드럽고 깊이 있은 웃음의 표정을 벗지 않는다. 불로동이나 조진개라는 이름, ‘땅딸보’ 표현을 미화한 면장(免長), 몰락한 박사회관의 개칭 박살회관 등 도처에 숨어 있던 일탈의 표현들이, 수미상관한 해학성 꿰미에 걸려 있음을 보게 된다.
조진개의 영악한 위선이 세태 표면에 떠오른 장면을 두고, 작가는 ‘봄이 왔는데도 제비가 불로동에 돌아오질 않았다’는 문장으로 상징화한다. 일찍이 흉노족을 회유하려고 인질이 돼 변방으로 끌려간 중국의 미인 왕소군이, ‘호나라 땅에는 화초가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는 명편의 구절을 남겼다. 어쨌거나 이 작가가 생각하는 불로동의 봄은 조진개의 성공 따위와는 당초 거리가 멀다. 인간다운 인간이 모여 사는 동네, 그곳에만 봄도 제비도 돌아올 것이란 핍진한 소망이 이 소설 문면(文面) 아래에 숨어 있는 까닭에서다.
조진개와 천금순의 이 어둡지만 쾌활하고 아픈 가운데 웃음 번지는 이야기는, 앞서 빈영출·성유정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한국 현대문학에 보기 드문 골계와 해학의 소설 미학을 구현했다. 그런데 단편으로 끝난 이들의 다음 이야기가 편을 달리하여 계속되거나 장편으로 확대됐더라면, 또 다른 진진한 이야기 전개를 만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미련이 남는다. 이병주의 다른 소설들에서 어렵지 않게 목도하던, 그 장강대하 같은 이야기들과 어깨를 겯고 말이다. 이 작가의 그 가능성이 더 일찍 사라진 아쉬움은, 곧 한국 소설 일반에 걸치는 아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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